부마 민주항쟁 10월 16일 일어난 사건이 있습니다. 오늘 자세하지만 간단하게 알려드려 보겠습니다.
일단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육하원칙 비슷하게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언제 1979년 10월 16일에 어디서냐면 부산 및 마산 일대에서 일어났으며, 누가 일으켰다면 학생과 시민이 일으켰고 또한 무엇을 위해 투쟁하였느냐면 반정부 시위를 위해서 일으켰습니다. 왜 무엇 때문이냐면 박정히 의 유신독재에 반대했기 때문으로 설명드리면 되겠습니다.
1979년 5월 3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민주회복'의 기치를 든 김영삼(金泳三)이 총재로 당선된 후 정국은 여야 격돌로 더욱 경색되었다. 정말 이런것을 보면 정말 지금 그랬다면 어떻게 됬을가 생각이 듭니다.
이어 8월 11일 YH사건, 9월 8일 김영삼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 10월 4일 김영삼의 의원직 박탈 등 일련의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유신체제에 대한 야당과 국민의 불만이 크게 고조되었다. 그리고 시민들또한 들떠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10월 13일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이 사퇴서를 제출하였으나 공화당과 유정회 합동 조정회의에서 '사퇴서 선별 수리론'이 제기되어 부산 및 마산 출신 국회의원들과 그 지역의 민심을 크게 자극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에서는 10월 15일 부산대학에서 민주 선언문이 배포되고, 16일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 시민들이 합세하여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전개되었다. 시위대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파출소·경찰서·도청·세무서·방송국 등을 파괴하였고, 18일과 19일에는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이에 정부는 18일 0시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1,058명을 연행,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으며,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하고 군을 출동시켜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비록 시위는 진정되었으나,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함으로써 유신체제의 종말을 앞당긴 계기가 되었다. 부마 민주항쟁 [釜馬民主抗爭] (출처:두산백과)
부마항쟁의 역사적 사건의 일정입니다. 그리고 관련된 여러 이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렇게 계엄령까지 선포하면서 부산 및 마산의 시민과 학생들을 탄압했던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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